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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기 좋아서

작성자
정상원
작성일
2023-12-12 10:35



 “여기만큼 술 마시기 좋은 동네가 없어서요.” 요즘 부쩍 왜 군산에 머물고 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하긴 여행으로 온 도시에 11개월째 머무르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지. 처음엔 이렇게 오랜시간을 이 곳에서 보내게 될 줄 몰랐다. 애초에 어디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관심이 없던 동네니까. 친구에게 물어봐도 ‘거기 아무 것도 없어’란 대답 뿐. 내가 아는 군산은 ‘전주에 놀러갔다가 빵사러 잠깐 들르는 도시’였고 ‘짬뽕 이 유명한 도시’였다. 군산에 도착한 날. 모두들 그러는 것 처럼, 점심으로 짬뽕 한 그릇 먹고, 빵 하나 사들고 숙소에 들어가 잠시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해가 진 후 밤이 되어 거리에 나왔을때, 그제야 진짜 군산을 마주하게 되었다.




지금 지내고 있는 동네는 영화동과 월명동. 근대문화역사거리라는 이름으로 일제시대 때 지어진 건물과 팥빵과 야채빵이 유명한 이성당,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장이 있는 군산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맘만 먹으면 끝에서 끝까지 10분이면 갈 수 있는 이 작은 동네에 모여있는 술집만 약 36곳. (직접 한시간 여를 골목 사이사이 걸어다니며 집계한 수라 아마 놓진 공간이 있을 수 있다.) 이 중 14곳 만이 소주를 주로 파는 공간이다. 대부분이 소주를 판매하는 공간으로 이뤄진 번화가와 달리 영화동과 월명동은 오히려 소주보다 전통주, 와인, 사케와 칵테일을 마실 공간을 찾는 것이 더 쉬운 동네다. 




감투를 쉽게 쓰게 되는 스타일이라 다양한 모임에 불려 술자리를 가진 적이 많지만, 아직도 소주의 분위기는 어렵다. 좋아하는 이와 함께 소주 한병으로 진심을 나누는 순간이 아니라, 모두와 함께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분위기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힘들어하니, 소주 특유의 진심이 오가게 만드는 거친 분위기가 가끔 무섭게 다가왔다. 술을 좋아하면서도 술에 약한지라 천천히 술을 마셔야 하는데, 의지와 상관없이 잔을 빠르게 부딪쳐야 될 것 같은 분위기도 어려웠다.




내게 술은 취하기 위한 수단보단, 맛과 향을 즐기기 위한 음료에 가깝다. 여기에 기분 좋은 알딸딸 한 스푼. 취함이란 것은 맛있는 식사를 하고나니 멋들어진 웨이터가 웃음지으며 가져다준 포츈쿠키 같다. 어떤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기분좋게 만드는, 옆 사람과 이야기 나눌 수 있게 해주는 플러스 알파의 존재. 




알코올로 이뤄진 술은 다른 음료에 비해 더욱 다채로운 향을 원물에서 뽑아내고 입안에서 발산한다. 마치 향수처럼 말이다. 애초에 술을 만드는 방법 중 하나인 증류기법이 향수를 만드는 방법에서 시작되었다. 연금술사가 향수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재료를 끓인 후 증기를 냉각시켜 에센스/정수(spirit)을 뽑아내던 증류기술이 증류주의 시작이라 보기 때문이다. 물론 술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하도 많다 보니 무엇이 맞다 아니다 하긴 어렵지만, 하나 재미있는 점은 증류주를 뜻하는 영단어가 바로 스피리츠(spirits)라는 것이다.



 

실제로 증류주인 진(Gin)을 만드는 방법을 살펴보면, 다양한 허브를 술에 넣은 다음 증류를 시키거나, 증기가 레몬, 라임의 껍질을 통과하게 만들어 술에 향을 입히는, 향수를 만드는 듯 한 과정을 취한다. 원물을 계속해서 증류시켜 만들어낸 순수한 알코올에 물과 감미료를 타 만든 소주보다, 만드는 재료, 방법, 지역에 따라 다채로운 향을 내뿜는 가지각색의 술을 만나기 쉬운 이 동네가 나와 같은 술꾼에겐 더욱 최적이었다.




무엇보다 이 동네, 혼자 술 마시기에 불편함이 없다. 아무리 맘에 드는 술과 분위기를 발견하더라도, 홀로 테이블을 차지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선뜻 들어가기 어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이 곳엔 바테이블이 준비된 가게가 참 많다. 대부분 새로 만들어진 건물이 아니라, 과거에 만들어졌던 누군가의 집, 오래된 가게에 들어와있기 때문이다. 빙 돌아가야지 입구가 나오거나, 매장 한 가운데 계단이 있는 요상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공간이 많은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좁은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바테이블은, 홀로 다니는 이방인에게 언제든 기꺼이 자리 하나를 만들어주었다. 혼자면서 같이 있고 싶어하는 모순적인 마음도, 관광객이 많은 이곳에서 여행객과 현지인의 교류도 모두 해결해주니, 정말이지 혼술하기에 최적인 동네다.




바다와 맞닿은, 아니 바다 위에 만들어진 동네. 간척지인 이 곳엔 사람으로 이뤄진 밀물과 썰물이 오간다. 뱃사람이 잠시 배를 정박하고 지내다 떠나곤 했던 동네, 일본인이 쌀을 수탈하기 위해 지내다 쫓겨난 동네. 미군이 쉬는 날마다 나왔던 동네이자, 이젠 관광객으로 가득해졌다. 




잔뜩 조용해지곤 하는 동네. 이곳에서 11개월째 홀로 돌아다니며, 홀로 술을 마셨고, 함께 이야기 나누며, 함께 잔을 기울였다. 90살이 다 되어가도록 장사를 하고 계신 할머님과, 군산을 떠났다 군산을 살리기 위해 돌아온 사장님.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예술가와 나처럼 이곳이 좋아 머물게 된 청년. 각자가 가지고온 이야기가 섞이고 얽히는 순간은 바로 술을 마시던 순간이었다. 




이 곳이 술마시기 좋은 동네인건 그 때문일 것이다. 500걸음안에 모든 주종을 맛볼 수 있어서도, 혼자 앉을 자리가 잔뜩인 동네여서도 아니라, 수 많은 이야기가 오가며 쌓인 동네라서. 앞으로 이 곳에 지난 11개월동안 모은 술과 군산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풀어보려 한다. 




언제나 그렇듯 책상 한켠에 위스키 한 잔을 옆에 둔 채 말이다. 취하기 좋아서 머물고 있는 군산. 오늘도 어김없이 취한채 말하지만, 여긴 정말이지 술마시기 좋은 동네다.